>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이름 박영덕
상세 date : 2018.09.12 , hit : 42
제목 성령을 좇아 행함을 위한 기본 전제 첨부화일
          

성령을 좇아 행함을 위한 기본 전제

 롬7:21~8:4                                                                                    정진국 목사


전체적인 숲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언제나 교회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이 교회 안에 역사하심을 볼 때도 언제나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곧 전체적인 숲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숲 안에서 오늘의 시점, 그 숲 안에서 오늘의 문제, 그 숲 안에서 나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되면 그 나무의 귀중함을 알았다고 생각되지만, 결국에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오히려 전혀 엉뚱한 길에 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전체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숲을 보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예컨대 구원이라는 것을 단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라고 단편적인 나무만 보게 되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큰 숲을 통해서 보게 되면,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의 시발점에 다시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외에는 다른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분명히 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몇 주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내용의 주된 핵심은 하나님께서 경륜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성령시대가 오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인 실행의 시대가 바로 성령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었던 성부시대가 성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좀 더 완성 되어졌고,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어졌던 객관적인 사실들이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서 주관적인 실제가 되는 성령시대가 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시대에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한 율법이라는 것이 성부시대에 주어졌지만, 성자 예수님의 필요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어졌고, 인간의 생활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듭난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행동 규범으로 생각하며, 그 영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우리가 얘기 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시대가 열린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앞서 입증을 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성령을 좇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전에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기본적인 전제들이 있습니다. 실행을 위한 기본적 전제들입니다. 그 점을 오늘부터 몇 시간에 걸쳐서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실행적 믿음에는 내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우리는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경륜이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실행되고, 실제가 되는 그 과정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면, 로마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프로그램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교회를 통해서 우리 안에 어떻게 실제가 되는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책입니다. 즉, 하나님의 경륜의 계획들이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셨고, 또한 그 일들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져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이고 실행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 책이 로마서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를 통해 전체적인 하나님의 경륜의 큰 그림을 알았다 할지라도, 이제 그 경륜의 뜻을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는 것을 알려면 로마서를 봐야 합니다. 로마서가 그 만큼 중요합니다.

 
로마서는 단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 시킨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를 교리적인 책으로 보면 안 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계획,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사실들,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화롭게 우리의 실제가 되는가 하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실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실행들은 반드시 어떠한 사실들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실행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것이 실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면, 예수를 믿어서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실행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구원받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신득의(이신득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실행적인 부분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 10:10) 그래서 ‘율법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실행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행적인 부분에는 반드시 그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내용, 근거가 무엇인지 함께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가 하는 믿음의 내용이 함께 설명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내용을 전제로 한 믿음입니다. 내용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의 내용을 알자.

 성화의 원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죠? 성화의 원리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좇아 우리가 성화가 이루어진다고 할 때도 ‘성령을 좇는다’는 실행적인 부분을 이야기 할뿐만 아니라, 성령을 실제로 좇는다는 것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담고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실행이 있고 내용이 있습니다. 내용에 따른 실행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주목하셔야 됩니다. 만약에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라는 실행만 있으면 믿음의 내용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개념에 대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을 통해서, ‘오 주 예수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고 할 때, 예수 믿음을 어떠한 신비한 체험을 중심으로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실행은 있는데, 그 실행이 담고 있는 내용은 천차만별일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도, 그 믿음에 대한 뚜렷하고 정확한 내용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이 있어야 믿음의 성격이 규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따른 믿음을 우리가 구사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용 없이 ‘나도 예수 믿어요’라고 하는 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화의 원리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아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성령의 요구들이 열매로 맺어진다”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오히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점이 큰 오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실행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믿는 것이 실행이듯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실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실행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로마서 5장, 6장, 7장, 8장 서두까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모르게 되면, 성령을 좇는다는 개념이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살듯이 성령을 좇는다는 것이 성령께서 내 속에서 율법적 요구를 강화시켜서 강화된 율법적 요구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이 없으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개념이 각기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신비한 체험들이 우리 안에 있어서 성령께서 음성을 들려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인 환청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는 존재를 개체적 존재로 놓고, 성령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개념들을 성령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과 내용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라고 한다면, 그 성령의 내용을 ‘능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들이 파생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행하였는데도 나는 율법의 요구가 안 이루어지던데요?”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실행은 알았는데, 그 실행을 위해서 알아야 될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하기 이전에,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성령을 좇아 행함이냐? 하는 부분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행에 앞서 내용을 이해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먼저, 로마서 8장 3절과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이것이 실행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롬8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 이전에 강조되고 있는 말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이점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성령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고서 성령을 어떤 체험이나 힘과 현상적 개념으로 이해하게 될 때에 성령을 좇아 행함은, 바울이 설명하려고 하는 성화의 원리로써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이 내용이 우리 마음속에 전제되어 있어야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비로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단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시고, 어떤 생각과 인도하심을 주시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말과 사뭇 다른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좇아 행함으로 말미암아 정죄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전제로한 성령의 좇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이 여러분 가슴속에 각인이 되어져야 합니다. 가슴에 못을 박아 두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은 성령이 독자적인 세력으로써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어떠한 사실들을 우리 안에 밝히 드러내서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예수님 당신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13~14) 예수의 것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이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복음의 원리에 있어서 놓치기 쉬운 내용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고 우리가 성령을 인식하게 될 때, 가져야할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없는 성령을 독자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서도, 또 정작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화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자꾸만 신비적인 힘으로 느끼려고 하니까, 자꾸 충만하게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해서 마음이 뜨끈뜨끈해지면 그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을 열심히 불러서 마음이 뜨거워져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정적 동기가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적 동기가 유발되어 졌을 때 성령이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감정적 동기가 유발되었을 때, 감동이 살아 있을 때는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감동이 오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불을 지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 그래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은 찬양이나, 어떤 집회를 통해서나,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통해서 내 속에서 생기는 감성적 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성적 충만이 나를 이끄는 것, 그것을 좇아가는 것, 그것은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끝없이 헛된 노력을 하다가 성령의 열매는커녕 오히려 체험이라는 것에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체험을 추구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그런 체험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오해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함을 위한 기본 전제 (2)

로마서 8장 1절의 의미.

 
이 점을 분명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로마서 7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 드리고 본문의 내용을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을 롬7장과 별개의 사건으로 독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성경 주석가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이 8장1절을 로마서 5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완성되어진 그리스도의 의가 여기서 선언되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성경은 문맥을 통해서 봐야 합니다. 문맥을 통해서 볼 때 로마서 7장의 내용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이제는 율법을 좇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법,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롬7:6)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더 이상 율법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것이 아니요, 오히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다. 곧 성령을 좇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로마서 7장 서두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율법은 선한 것인데, 왜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했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날까 해서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도 자문자답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특성상, 어떤 주제를 이야기 하고 그 주제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야기 시킨 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났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말하면, 누군가가 ‘그러면 율법이 악한 것이냐?’ 하는 질문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바울은 미리 그것에 대한 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라고 말합니다. 즉 결론을 향해 가는 도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의문점들을 해소시키기고 있는 내용이 바로 로마서 7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은 선하지만,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그 율법을 지키는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선해서 우리에게 법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죄의 정욕들이 일어날 뿐이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오면 올수록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선한 마음의 법이 발동되지만, 그러나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죄를 범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알게 되어졌다. 그래서 한 가지 법을 깨달았는데,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의 법이 내 안에 있어서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로마서 7장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죄의 정욕이 점점 드러나게 되는 것이 로마서 7장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수식어로 시작합니다. 7장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8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로마서 8장 3절은 7장의 내용은 단 한 마디로 요약하여 결론을 내는 말입니다. 롬7장의 내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롬 8:3)

 
그래서 로마서 8장은 7장과 별개의 내용이 아니고, 7장에서 본래 바울이 하고자 한 핵심 주제를 연결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 왜냐면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을 좇아 행하게 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로마서 4장까지의 주제였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이제는 로마서 7장에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 구원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 있을 때 참된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함께 죽게 됨으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될 때, 율법의 요구가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이 이야기가 7장과 8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가 매끄럽게 연결이 되려면 로마서 8장1절의 말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율법과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니 왠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이 말씀은 오히려 8장의 결론들을 더욱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배필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2장 18절의 말씀 직후에, 21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로 이어진다면 아주 매끄럽게 내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기에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결정하셨고, 그 결정 후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고 이야기해야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정말 어색한 장면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이 아니고, 각종 새들과 짐승들을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창 2:19~20) 문맥의 흐름을 볼 때, 이 부분은 매우 어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즉, 문맥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짐승을 짓고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도하는 바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와를 짓는 과정과 짐승들을 짓는 사건이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무관한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와를 짓는 사건 속에 더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으로 하여금 스스로 배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필은 다른 짐승들이 될 수 없고, 자기와 같은 형상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기 위해서 이 과정이 삽입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의 삽입은 하와를 짓는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성경에는 어떤 사실들이 문맥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지 못하게 하는 독특한 사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오히려 문맥을 더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합니다. 7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하여 자유케 하시고, 영을 좇아 행하도록 하셨다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법 가운데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8장 1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라고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8장에서 해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로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이 문제를 해방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위치적인 문제로 해방을 선언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문맥의 흐름상 불거져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지만,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이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 말씀은 결국 로마서 6장의 내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한다고 할 때, 성령을 좇는다는 내용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로마서 6장의 사실들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내 마음속에 깨달아서 밝아져 있지 않으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의미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서 6장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성령을 좇아 행함은, 율법을 대안으로 주신 성령을 좇아 행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해방은 성령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의 의미.

 사실 생각해보면, 1절 말씀 못지않게 3절도 상당히 어색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이미 2장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언급한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맥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령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뜬금없이 예수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단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표현 때문에 8장 1절을 포함한 8장 서두의 말씀들이 성화의 내용이 아닌, 칭의에 관한 내용이라고 오해하고 이 본문을 그렇게 풀어버리는 목사님들이 매우 많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정죄를 해방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거든요. 그 정죄로부터 해방시키는 십자가의 죽음은 결국 우리의 칭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칭의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기본적 전제를 깔고 로마서 8장 3절을 읽음으로 8장 1절에서 이야기 하는 해방은 육신으로 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정죄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풀 수 없는 것은 4절 말씀 때문입니다. 3절의 “육신의 죄를 정하사”라는 말씀은 4절로 연결됩니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 8:3후반부~4)

 
이것은 우리의 칭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우리의 성화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화의 이야기에 칭의 문제를 다루듯이, 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육체에 죄를 정하는 이러한 일이 있어야 합니까? 사실 이런 의문이 이 말씀이 성화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 6장에 나와 있습니다. 6장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칭의 만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옛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포함해서 예수 안에서 죽게 하고, 예수의 부활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6장의 결론은 6장 11절에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자가 되게 하셨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이 8장 3절의 말씀은 로마서 6장의 내용을 전제로 한 실행임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저와 여러분에게 밝아지면 이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율법적 관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고 하면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인식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역사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6장을 전제로 한 성령을 좇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성령을 좇아 행한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 안에 있는 딜레마가 이런 것입니다. 복음적으로는 많이 정리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만나보면 교리와 실행은 있으나, 실제적인 결실과 열매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그리스도의 열매, 성령의 열매인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봅니다. 율법적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한계를 복음주의 안에서도 여전히 그 한계를 안고 있단 말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가운데도 30년 전에 복음을 깨달았는데, 그 사람을 만나보면 여전히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육신적이지 않다고 보여주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정작 거룩함의 열매는 없습니다. 매번 훈련과정이라고 말하며, 빚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하나님의 선포가 30년이나 걸리는 힘든 것일까요? 이것은 복음은 깨달았으나, 그 깨달은 것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영안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속에, 로마서 6장의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았다는 새로운 피조물의 인식이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을 위해서 성령에게 주목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실제로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주체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이 오면, 당신에 대해서 말할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 16:15) 성령님은 독자적인 힘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 때문에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고,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자신감과 확신과 능력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리 성령으로 행한다는 복음의 내용을 알았다 할지라도 또 다른 율법적인 행함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주시는 어떤 감성과 느낌이 내면적 동기로 발동되어질 때, 그것을 좇아 행한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내면적 동기는 어떠한 종교적 체험으로 말미암는 감화력이기 보다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우리가 깨닫고, 그 사실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내면적 동기가 성령의 이끄심이요, 성령의 역사하심이요, 인도하심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인도하심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나는 죄에 대해여 죽었다”로, “나는 의인이 되었다”라는 그 확신으로 성령이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 6장의 인식 없이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내용이 전혀 없이 얼마든지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능력을 주셨다. 이제 성령께서 내면적 동기로 우리를 이끄시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러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해방을 선포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이것도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자기 아들을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체의 모양을 죄로 정하심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 로마서 8장 1절로 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2절에서 성령의 법, 3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 4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 서로 엇박자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성령, 그리스도-성령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성령-성령-성령 하게 되면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감성주의 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껍데기만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실행 속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까? 이 내용이 빠져있다면 오늘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로마서 6장에서 말하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의에 대해서 산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지 못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내용을 왜곡하게 만들고, 올바른 성령의 역사를 도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실행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을 이끄는 내용을 아는 것입니다. 아멘.

 
내용 없는 실행은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전글 :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다음글 :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방법
답변 목록보기


<% if setrepleenable = 1 then %> <% end if %> <% SET objRs = NOTHING : Set board = Nothing : Set util = Noth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