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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영덕
상세 date : 2018.09.12 , hit : 27
제목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방법 첨부화일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방법

 - 이다윗 목사

  

어느 유명한 성령사역자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믿음’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 책의 내용 중에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방법’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모두 네 가지였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믿음을 가지고 영의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이 조금 신빙성이 없는 느낌이 들어 성령님께 여쭸습니다. 그랬더니 성령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방법을 세 가지로 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 첫번째 방법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영의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은 영어로 보면 단순한 입니다.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이것은 성령을 포함해서 모든 영들에 대한 총체적인 단어입니다. 이곳에 쓰인 <신령>이라는 말도 <프뉴마>입니다.

놀라운 것은 귀신에 대해 사용될 때에도 같은 <프뉴마>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귀신들도 다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구절 중에서 하나만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귀신>이라는 단어는 원어는 <프뉴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찾아 읽을 때 볼 수 있는 단어와 같습니다. 성령님을 포함해서 우리의 영이든지 악한 영에 대한 단어는 전부 <프뉴마>입니다. 단지 그 영이 어떤 영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영(프뉴마)이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를 붙일 뿐입니다.

<성령>님을 사용할 때 성(하기오스)과 영(프뉴마)를 붙여 표기하고 있습니다. 성스럽다는 뜻의 <하기오스>와 영이라는 뜻의 <프뉴마>를 붙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귀신>에 사용될 때에는 항상 <더러운>이나 <악한> 혹은 <벙어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영>이라고만 표기해 있다면 그 <영>이 어떤 영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문맥을 통해서 그 영이 어떤 영인지 알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수식어를 함께 상용하여 그 <영>이 어떤 <영>을 뜻하는지 알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요한이 언급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영이라고 말한 사도요한의 뜻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예배를 받으신다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영으로 존재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하나님이셨으며(창 3:8), 모세에게 등을 보여주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출 33:23). 사도요한은 영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으며(계 4:3) 에스겔은 하나님의 형상이 마치 사람 같다(겔 1:28)고 하지 않았나요?

계속해서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마시고 성경에 씌어져 있는 내용을 당신의 생각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시오. 당신의 생각은 누군가의 말에 의해 정리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누군가의 말에 의해 정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당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은 요한의 말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영의 기도를 하십시오. 영이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도 육적으로 드리지 않듯이 하나님을 육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의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의 눈으로는 결코 성령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영을 통해서 성령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영으로 성령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속죄소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사실을 늘 잊지 마십시오. 속죄소는 지성소 안에 놓여져 있으며 언약궤 위에 있습니다. 언약궤가 없는 지성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블레셋에게 언약궤가 빼앗겼던 불운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11)

 

물론 그 때에도 지성소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약궤가 놓여있지 않는 지성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두 아들의 죽음과 언약궤의 빼앗긴 소식을 듣고서 뒤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음을 당했습니다.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죽음 소식을 전해들은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충격과 함께 해산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이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4:19~22)

 

언약궤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으며 모든 예배와 제사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행해졌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준비한 성막에 안치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삼하 6:17)

 

다윗은 언약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언약궤와 함께 했으며 언약궤로 인해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당신도 언약궤를 다윗처럼 당신의 성전에 안치하십시오. 당신의 몸이 성전인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안에 지성소가 있으며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놓여져 있음을 알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게 “언약궤로 들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난 매일 언약궤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언약궤는 키가 183cm나 되고 몸무게가 100kg을 넘는 나에게는 도저히 들어 갈 수 없는 조그만한 상자입니다. 현대인 성경은 언약궤의 크기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치로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브사렐은 아카시아나무로 가로 113센티미터, 세로 68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의 궤를 만들었다”(출 37:1)

 

성령님께서 내게 언약궤로 들어 가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영의 기도를 할 때 언약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온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도 받았으며 손에 어떤 전류가 흐르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수 많은 침이 돋는 느낌도 받았으며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느낌도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수시로 주님을 만났으며 주님은 나를 이끄시고 천국을 보여 주셨으며 여러 지역을 함께 돌아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영광의 빛에 휩싸인 보좌의 모습도 보았으며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단 한번도 성령님의 대화가 없이 언약궤 안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으며 그때마다 항상 큰 기쁨과 감격이 넘쳤습니다.

나의 경험이 당신에게 부담이 됩니까? 아니면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까?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은 경험을 갖게 되길 소원합니다. 영의 기도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 특권을 사용하는 것은 당신의 결정과 의지에 달렸습니다.

지금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영으로 기도하겠다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십시오.

 

 

하나님을 아십시오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영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육적인 감각을 자극시키는 그런 조잡한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지정의의 단계를 높여주는 심리학이나 어떤 수준 높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우리의 영으로 이해되는 책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저들은 혼(mind)의 상태에서 성경을 읽을 때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영으로만 이해 되도록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마도 마가복음 11장이 가장 적절한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11장의 어느 한 부분을 읽어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이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3~24)

 

만약에 이 구절을 육(body)적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해석이 될까요? 도무지 이해되지도 않을 뿐더러 성경 말씀을 가짜로 취급할 것입니다. 혼(mind)적으로 읽는 사람은 어떤 반응을 가질까요? ‘글쎄, 이해는 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spirit)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래, 맞아,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구절이지만 육(body)적으로 읽는 사람과 혼(mind)적으로 읽는 사람이 다르고 영(spirit)적으로 읽는 사람이 다른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미국 대통령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그 사람을 잘 알고 지내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방송매체와 책을 통해서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살아보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수십번 읽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단 한번을 읽어도 그것이 영적으로 읽었다면 수십 번 읽은 사람보다 훨씬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적으로 성경말씀을 읽어야 함을 뜻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것을 <묵상>이라고 말합니다. 시중에 좋은 묵상을 돕는 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경말씀을 읽는 것은 묵상보다 훨씬 깊은 단계입니다. 묵상은 혼적인 깨달음을 주지만 영적으로 읽을 땐 우리의 영에 커다란 변화를 주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깨달음인 것입니다. 아무리 묵상을 통해 우리의 혼이 변화되고 의지나 결단에 큰 도움을 주지만 그것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성경일독을 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하였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많은 좌절이 있었습니까? 창세기나 출애굽기 부분만 손 떼가 묻어있지는 않는지요? 이것은 모두 우리의 혼(mind)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혼(mind)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과 결단과 의지를 갖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의지이기 때문에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더욱이 성경은 영적으로 쓰여진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노력과 의지로써는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성경 말씀을 너무 잘 모른다’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즘도 <성경맥잡기>같은 세미나가 늘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말씀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전혀 지루해지지 않으며 읽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성경말씀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령님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성령님께서 성경말씀을 풀어 주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에게 직접 성경말씀을 배우는 것은 다른 어떠한 성경학자나 주석을 통해서 배우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베니힌 목사는 성령님과의 대화가 가능할 때 거의 1년 동안 성령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내가 알기론 그는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목사가 된 것도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경해석은 더 놀랍습니다. 내가 알기론, 그의 성경해석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를 통한 해석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풀어주신 해석이 분명합니다.

나 역시 성령님께서 성경을 해석해 주십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석을 보고 머리를 짜 내도 알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성령님께 그 구절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성경구절을 설명해 주십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음악을 듣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고 멈춤이 없이 전해집니다.

이것은 마치 꿈을 해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꿈을 잘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의 꿈을 들을 때 가급적이면 구체적으로 듣습니다. 사람들이 꿈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저 듣기만 합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들은 내용이 어떤 해석이 될 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들을 뿐입니다. 다들은 다음 성령님께 꿈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꿈을 해석해 주십니다. 5초도 안 되어서 성령님의 해석은 곧 바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긴 꿈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 해석은 1분도 채 안 되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내가 요셉의 자리에 있었다면 성령님께서 요셉처럼 꿈을 설명해 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다니엘처럼 보지도 못한 꿈을 설명해 주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 얼마쯤 되었을 때 성령님께서는 내게 캘리포니아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한 동안 기도에만 열중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령님께서는 내게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쯤 지났을 때 성령님은 설교원고를 만들지 말고 설교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설교원고를 잘 준비해도 말씀을 증거할 때 떨리곤 했는데 설교원고를 준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설교를 전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채 단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은 내게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성령님 말씀에 순종하여 단 위에 섰습니다. 조금이나마 설교말씀의 줄거리라도 얻기 위해 성경본문을 읽으려 할 때면 성령님께서 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설교내용에 대해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설교제목이나 설교본문은 주보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에 토요일날 성령님께서 설교제목과 설교본문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설교를 위한 그 어떠한 준비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때때로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떤 내용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무슨 단서라도 얻고 싶어 안달일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어떠한 노력이나 인간적인 준비를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줄곧 난 설교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말씀만 들으면 되었기 때문에 설교하러 단 위에 서면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내가 한 설교를 다시 듣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준비한 설교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들려주신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설교 하면서도 아하~ 이 내용이 이렇게 해석되는구나란 생각을 많이 갖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설교말씀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 성령님께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 묻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항상 내 음성만 들으면 된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당신도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성경을 잘해설할 수도 있고 말씀 증거를 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해석해 주시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 중 하나입니다. 성령님은 주님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영의 능력을 개발하는 세 번째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서 너무도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면 좋은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십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도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모두 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도 세 분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는 분도 세 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경우엔 성령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나는 한 때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늘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이 문제를 놓고 여쭸습니다.

 

“성령님, 제가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면 언제 주님과 대화를 나룰 수 있죠?”

 

성령님께서는 내게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곧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님과만 대화를 나누는 것에 샘 나실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이죠.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서로 존중과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당신도 그것을 느끼십니까?

성령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든 아니면 주님과 대화를 나누든 모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 치료해 주시옵소서”라고 말을 했다고 해서 “성령님, 치료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한 사람과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께서는 모두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세 분의 하나님께서 각각의 역할이 분담되었을 뿐이지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계획은 완벽하게 같은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성령님은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직분은 모두 다 섬기는 직분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땽에 우리를 섬기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님 혼자서 사시는 것도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근원이시고 주님은 근원됨을 나타내시며 성령님은 그 근원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특별할 경우에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하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나는 성령하나님과 하루 종일 함께 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성령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땐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당신은 지금 마음 속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능합니다. 당신은 하루 종일 성령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은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육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으로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으로 살기 위해선 먼저 육을 죽여야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만약에 당신이 영으로 살아가면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밥도 먹어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합니다. 아마 일도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육체적인 모든 행동들은 우리의 영과 구분될 수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바울은 영과 육의 관계를 너무나 잘 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육의 몸이 있고 영의 몸이 있습니다. 육의 몸이 더 큰 사람이 있으며 영의 몸이 더 큰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의 몸이 더 큰 사람은 육의 몸이 작은 사람입니다.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으로 살아갑니다. 더 이상 육체의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육체의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영의 삶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며 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체가 살아 있으면 영은 죽습니다. 영으로 살기 위해선 반드시 육의 소욕을 죽여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무엇입니까? 자주 언급하는 내용입니다만 다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육으로 살게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세가지 카테고리입니다. 하와도 이 세가지 카테고리의 유혹을 받았습니다(창 3:6). 예수님도 광야에서 이 세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마 4장).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신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육체의 소욕이 승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이긴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선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미 나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와 함께 교제를 나누십니다. 성령님은 영이십니다. 물론 성령님도 인격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영으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영으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으로 성령님과 동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영으로 사십시오. 그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정결’의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끗 하십시오. 우리는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는 이것을 ‘집중’이라고 말합니다.

영의 능력을 키우는 것은 곧 ‘성령과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받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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