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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영덕
상세 date : 2018.09.13 , hit : 25
제목 선교의 문화적 이해와 접근 첨부화일
          

선교의 문화적 이해와 접근 

 

 과거 선교사들은 종교를 문화의 한 요소로 보기 때문에 현지 문화를 무시하고 복음과 더불어 그들 자신의 문화까지 심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실제로 기독교가 들어간 국가들은 심각한 문화적 충돌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복음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보다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상보다 많은 순교자들을 양산해 내기도 하였고, 이러한 서툰 접근으로 인해서 복음은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즉 문화적 침략자로 인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의 문화적 영향까지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초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최소한 기독교 문화에 있어서만큼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줌으로서 정치나 경제, 그리고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타민족으로 파송 받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이러한 현상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다수가 복음 이외의 자국문화들을 강요함으로서 많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합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만을 챙기고 문화적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해 떠나버리는 경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이 있게 되면서 선교문화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신학교에서 자리잡게 되고, 이제는 선교사를 준비하는 자들에게는 필수과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신학교에서는 이 학문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우리의 현실에 맞는 적절한 연구와 강의를 필요한 실정입니다. 이곳에서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문제들을 제시하고 이해와 접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문화의 형성은 지형적으로나 구성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 같은 단일 민족으로 형성된 민족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미국과 같이 다인종 국가는 매우 합리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한국과 같은 민족은 점차 다민족 국가가 되어가면서 합리적인 사고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민족의 구성원이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에 따라서 문화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문화라는 것이 결코 고정된 틀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혹은 조선시대의 문화를 오늘날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전통일 뿐이며, 오늘날에는 현재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과거의 문화들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문화는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화는 생활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집니다. 현대인들의 생활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현대인들의 문화를 급속히 변화시켜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세대차를 느낄 수 없었지만 이제는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도 세대차를 느낄 정도로 급속히 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정보가 노출이 되어 있는 시대에는 문화적 환경이 더욱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현대 음악을 들으면 소음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10대 청소년들이 부모 세대의 음악을 들으면 따분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변하고 있는 문화나 민족들 간에 서로 다른 문화들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선교사는 먼저 자신이 어떠한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수용자 문화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문화들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선교사 자신이나 수용자가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선교활동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선교사는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낮선 이방인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친절함 때문에 견디는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생각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곧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자세에 따라서 이러한 기간은 길어질 수도 있으며, 결국에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들을 종종 목격합니다.


선교사들이 문화충격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본국 문화와 비교하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결국 스트레스로 발전이 될 것이고, 결국에는 우울증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떨어져서 외롭기 때문에 오는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더욱 큰 문제는 현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외로움을 각오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결심한 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교사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적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가 주님의 일을 위해서 떠났기 때문에 경건의 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타국에서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묵상하고, 그 속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초기 사역에서 그리 바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시간 성경을 연구하는 일들을 위해 보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극도의 긴장감과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성경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에게는 실제로 더욱 많은 것들이 압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갖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선교사로서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문화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최대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저 사람들 왜 이래?라는 불평에서부터가 아닌 그들의 문화가 시작된 원인을 바로 알고, 스스로를 그 문화 속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기초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 대부분은 이미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습관들은 오히려 타국인에게 거슬리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 속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스스로 어떻게 적응해 갈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들을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를 빠른 시일 내에 습득하는 것입니다. 언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결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언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현지어는 배운 것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시 배워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문제 해결 없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는 거의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후에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숙제는 단순히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문화적인 적응을 끝냈다 할지라도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면 그 사역은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문화를 복음에 조화를 시킬 수 있는지가 선교사에게 주어진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문화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타문화를 지배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으로부터 파송되었고, 그들은 여러 식민지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가장 효과적인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민족이 열등(미개)한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선교사들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상태에서 파송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는 민족의 문화가 더욱 우월한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그들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강대국으로부터 파송되어지기 보다는 2/3세계에 속한 사역자들에 의해 파송되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한 때 매우 열등한 문화적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이 땅에 토착화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전통적인 문화보다는 이미 서구화된 문화 환경이 되어 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은 선교사들에게 사역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었고, 수많은 선교사들은 이 땅에서 매우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방법들이 결실을 맺기에는 어려운 환경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과 같은 다양한 정보수단들로 인해 문화적 격차가 매우 좁혀졌고, 비록 열등한 민족들이라도 그들만의 전통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타문화들에 대하여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성경의 원칙을 벗어난 타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더욱 큰 실패를 안겨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접근을 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논쟁이 될 만한 내용들을 다루는 이유는 매우 현실적인 접근을 통하여 고정관념들을 벗어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선교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운데 하나는 일부다처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무슬림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다수의 민족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제도입니다. 그들이 일부다처제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요인, 부족간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죽고 결혼 적령기의 여자들이 남게 되는 환경적 요인, 부인이 많을수록 높은 신분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적 요인,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한 복수 결혼의 필요성을 들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 안에서 일부다처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다만 간음, 이혼 재혼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결혼에 대한 마태복음 19장 5-6절의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구절을 이혼에 대한 답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디모데전서 3장 2, 12절에 감독과 집사에게 대하여 “한 아내의 남편”에 대한 구절이 있는데, 이는 당시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구약 성경 안에서는 일부 다처제에 대하여 매우 관대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부 다처제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들에게는 매우 소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 문제를 매우 죄악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다만 그들의 문화를 적절하게 맏아들이고, 다만 그들에게 일부일처제가 이상적인 결혼제도임을 교육하고, 계도해 가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결혼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형이 죽으면 그 아내를 동생이 물려받도록 하는 제도입니다(창38:8,신25:5,마22:23-30,눅20:27-39). 물론 오늘날 유대인들은 대부분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성경 안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들의 전통에 대하여 정죄하시지 않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 대하여 수용하시는 입장을 보이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 문제에 대하여 문화를 어디까지 수용할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문화적 충격들 가운데 결혼문제 못지않게 논쟁이 되는 것은 유교의 영향으로 주로 아시아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는 조상숭배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한국의 교회들이 오랜 시간동안 갈등을 가져왔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가장 큰 가르침이었지만 공경의 차원을 넘어 숭배하는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당황하게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는 추도예배와 같은 방식으로 대치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여전히 죽은 자들에 대한 경배수단으로 인식이 되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기독교의 관점에서 동양의 가치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서구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들은 결혼을 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은 대가족 중심으로 위계질서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문화는 자칫 가정 파괴범과 같은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의 사상을 부활시키고, 가족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기독교가 가정 파괴범이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상 기독교는 결코 효의 사상을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서구 문명은 동양의 문화적 이해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외에도 각종 장례문화,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심지어 작게는 인사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적 접근에 대한 논쟁들이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 수용해 갈지에 대한 것은 현장에서 그들의 문화를 보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 그것이 수용 가능한 것이라면 고정관념을 버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문제로 문화적 차이들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대답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바바리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라”(골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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