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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영덕
상세 date : 2018.09.13 , hit : 32
제목 요세푸스는 누구인가? 첨부화일
          

요세푸스는 누구인가?

  

 (1) 가문

신약성서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참고 서적을 뒤적여 본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 "요세푸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요세푸스"라는 이름으로 인용되는 작품들은 신약성서의 시대적 배경을 기술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인용되고 있는 참고 자료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신약성서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물음은 흥미로운 것이 될 수 있다. 먼저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객관적인 역사 데이터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 요세푸스의 기록들 역시 해석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요세푸스 역시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삶 속에 조건지워진 인물이요, 그의 기록 역시 설득적, 상징적 의
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그의 기록 역시 "순수한" 의미에서 객관적 역사는 아니다. 이렇게 해석의 대상인 작품들의 저자인 요세푸스의 삶의 여정에 대해선 우리가 "비교적" 알 수 있는 바가 있으며 이러한 자료는 전체 작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반면, 신약성서를 해석하고자 하는 - 전문가이건 비전문가이건 간에 - 자들에게 각 신약문서들의 저자가 누구요 그들은 어떤 인물들이었느냐 하는 질문은 누구도 명답을 제시하기가 불가능한 물음이다 (물론 바울서신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즉 익명을 전제로 기록된 다수의 신약성서 문서들을 대함에 있어서, 저자의 (혹은 해당 공동체의) life story와 생생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알려져 있다면, 그 해석의 투명도가 훨씬 더 높아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경우, 그는 스스로의 삶에 관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물론 우리는 그의 자서전 기록 내용의 과장 내지는 (때로는) 심한 비약 등을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것이지만, 그의 기록을 토대로 그의 삶에 관한 어느 정도의 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

요세푸스는 무엇보다도 그의 유대-로마 전쟁(주후 66-70)에 대한 참전과 기록으로 유명한데, 이 유대-로마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의 삶에 관해서는 그의 <자서전> (이하 vita로 표기함) 1-19 절에 기록되어 있다. 요세푸스의 자서전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요세푸스 자신의 보도를 기초로 보면, 그의 혈통은 한 마디로 대단하다. 그의 부계 (父系) 혈통은 제사장 가문에 속한다. 더욱이 그의 가문은 24 반차 중에서 가장 첫 번째에 속하므로,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제사장 가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월하고 구별된 집안"(vita 2)으로부터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요세
푸스는 역대하 24,1-19(특히 7-18절)의 제사장 가문들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인 여호야립 가문에 속한다]. 그의 이러한 혈통적 자부심은 그의 다른 작품들 안에서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그의 친가가 엘리트 제사장 가문이라면, 그의 어머니 쪽은 왕족에 속한다. 요세푸스의 모친은 하스몬 가문의 여인이었고, 또한 그의 부모 이전의 세대에도 요세푸스의 할아버지들은 하스몬 왕가의 여인들과 혼인을 맺어 왔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가문은 제사장 가문과 왕족 혈통이 결합된 그야말로 존경받는 상류층 집안임을 강조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지체 높은 귀족 출신임은 수에톤의 <베스파시안의 생애> 5,6에도 언급되고 있다.)

요세푸스의 부친 마티아스는 아르켈라우스 10 년, 즉 주후 6 년에 태어났다. 특별히 그의 부친은 훌륭한 인품으로 많은 존경을 받은 인물이자 예루살렘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였으며, 요세푸스는 이런 덕망과 고상함을 소유한 부친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음이 강조된다. 마티아스의 아들인 요세푸스 자신은 가이우스 칼리굴라 재임 1년, 즉 주후 37 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이러한 가계 기록이 공적 문서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며, 또한 그 기록 목적이 자기 가문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vita 6). 어떠한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요세푸스의 가문을 비난했는지, 자신의 대적자들에 대한 이러한 류의 모호한 언급은 그의 작품 안에 간간이 발견되
는데, 이 경우 역시 그 대적자들이 어떤 이들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빌립보서 3,4-6에서 바울이 자신의 정통 유대 출신 성분을 강조하는 구절은 이러한 요세푸스의 변호적인 가계 기록과 흥미롭게 비교할 만 하다.


(2) 성장 과정 및 유대-로마 전쟁에서의 체포
요세푸스는 어린 시절에 이미 뛰어난 학식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14 세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고위층 인사들이 율법의 정확한 이해를 구하고자 늘 자신을 찾았었다고 한다. 16 세가 되었을 때 그는 유대교의 주요 세 종파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요구하는 과정을 모두 마쳤지만, 이에 만족할 수 없어서 바누스(Banus)라고 하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3 년을 보내었다. 바누스는 광야에 살면서 자신의 몸을 물로 자주 씻음으로 육체의 정결을 기하는 금욕주의자였다. 요세푸스는 바누스의 밑에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모호),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리새적 율법을 준하여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viat 7-12).

요세푸스가 이 부분에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음을 밝히는 것인지는 확정적이지 않다. 사실 요세푸스는 위에 언급한 세 종파들 가운데 바리새파가 아닌 에세네파의 덕목을 가장 고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 다른 곳에서 자신을 바리새인으로서 확고부동하게 규정하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단지 그가 바리새적 가치에 합당하게 살기 시작했다는 정도의 의미로 파악될 수도 있다.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가장 현저한 분파로 부상해 있던 요세푸스의 저술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여하튼 자신의 어린 시절의 총명함과 16 세의 나이에 세 개의 종파를 두루 섭렵했다는 것은 과장된 진술일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예수가 어린 시절에 성전 안에서 선생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보여준 슬기에 사람들이 감탄했다는 누가복음서의 보도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cf. 눅 2,39-52. 물론 누가복음서의 이 단락도 역사적 개연성이 박약한 미화 작업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주인공의 어린 시절의 지혜로운 면모가 부각되는 것은 전기문적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을 언급해둔다.)

네로 황제의 재임 기간 중 26 세의 요세푸스는 로마를 방문했었다. 그는 벨릭스 총독 재임 시절 로마로 압송된 제사장들의 석방을 청원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로 파송되었었고, 거기서 네로의 아내 포페아(Poppaea)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요세푸스의 로마 파견 임무가 성공적으로 마쳐졌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약 2 년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의 反-로마 저항이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A. D. 66 년).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해있던 요세푸스는 사람들에게 對-로마 전쟁의 무모함을 역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저항군의 지휘관으로 추대되어 군대를 이끌고 갈릴리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66 년 겨울부터 67 년 여름까지 그는 이 곳 갈릴리에서 베스파시안 (Vespasian)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의 공격을 방어해야만 했다.

요세푸스가 이끄는 유대인 병력은 결국 갈릴리 북서부의 요타파타 (Jotapata) 성에서 패배를 하고 만다. 47 일간 요타파타 성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은 결국 기습적 침공에 성공하였다. 이 침공이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요타파타 성을 몰래 빠져 나와 투항한 한 배신자가 로마인들에게 정보를 누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몹시 지쳐 있으며 마지막 밤 수비 교대 시간에는 대부분이 잠이 들어 있으니 이 때를 틈타 공격을 감행하라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이 날 요타파타 성읍에서는 1200 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약 4 만 명이 학살되었으며 (아이들과 여인들은 죽임을 면했다), 온 도시가 초토화되었다.

그런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자기 자신은 "신의 섭리로" 요타파타 점령 순간에 적진을 빠져 나오게 되어 한 동굴 속에 피신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정황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 동굴 안에는 40 명 가량의 사람들이 이미 은신해 있었고 상당량의 비상 식량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굴 속에서의 대피는 3 일을 넘기지 못했다. 이들의 은신처를 찾아낸 로마인들은 사절을 동굴 안으로 보내어 요세푸스에게 투항을 권하였다. 저항군의 지휘관을 생포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도 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세푸스 자신은 항복만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동료들을 설득하였으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체포를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겠노라고 소리지르며 요세푸스를 변절자로 몰아 살해하고자 하였다. 

요세푸스는 자살이 죄악이며 무모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하였으나 그들은 설득되지 않았다. 이에 요세푸스는 제비를 뽑아 순서에 따라 먼저 뽑힌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반복하여 자살의 범죄를 피하자고 제안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런 제안은 자신의 기지에 기인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비를 뽑은 결과 요세푸스는 마지막 순서로 결정되었고, 서로 정한 바에 따라 한 사람씩 동료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마침내 요세푸스가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목숨을 끊어 줄 차례가 되었다. 이 때 그는 그 동료를 죽이지 않고 설득하여 로마인에게 투항하였다.

요세푸스는 자신이 요타파타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로마인의 포로가 된 과정을 다분히 변호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인지의 여부를 확증할 제 2 의 자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유대-로마 전쟁에서 살아 남은 자신의 행동이 적절하고 정당했다는 자기 변호적 의도를 갖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렇게 저항군 지휘관 요세푸스는 포로가 되어 베스파시안 장군 앞에 서게 되었다. 


(3) 베스파시안 황제 등극 예언
요타파타 성이 함락되기 직전 요세푸스는 한 동굴 속으로 피신한다. 동굴 속에는 이미 40 명의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요세푸스가 피신한지 삼 일 만에 로마군은 이 은신처를 찾아내었다. 로마인들은 수 차례 동굴 안으로 사절을 파견하여 투항할 것을 권고하였다. 로마군이 세 번 째로 보낸 사절은 니카노르(Nicanor)라는 사령관이었는데, 이 자는 티투스의 친구였다. 니카노르와의 대화를 통해 요세푸스는 투항을 결심했지만, 요세푸스 자신은 이를 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대한 순종이라고 변호한다. 즉 자신의 꿈속에서 하나님은 유대인과 로마 왕들의 운명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주었고, 이 예언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꿈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진 않지만, 요세푸스는 그 꿈을 생각하면서 드린 (공개적) 기도를 적고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유대 나라를 무너뜨리시고 로마인들에게 모든 운명을 넘겨주시기로 결정하였다면, 그리고 다가올 일들을 알리기 위해 나를 [= 요세푸스를] 선택했다면, 나는 기꺼이 로마로 넘어가서 살겠습니다. 하지만 변절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살아가겠습니다" (bell 3,354).

이 기도를 마치고 요세푸스는 로마에 항복하겠다는 의지를 굳힌다. 비록 함께 있던 유대인들 대부분은 죽음을 당했지만 (차례로 목숨을 끊어주는 제비뽑기에 의해), 요세푸스는 극적으로 살아 남고, 니카노르는 그를 베스파시안 앞에 데리고 온다.
로마 병사들은 적군의 지휘관을 보기 위해 떼를 지어 몰려들어 그를 조롱하고 협박했지만, 다수의 로마 장교들은 요세푸스를 동정했다. 특히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 장군은 요세푸스가 힘겨운 와중에도 불굴의 용기를 잃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를 위해 아버지 베스파시안에게 탄원했다. 요세푸스는 당시에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장 노력한 인물을 티투스로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파시안은 포로 요세푸스를 네로 황제에게 압송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게 되고, 이 대면에서 베스파시안과 그 아들 티투스가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저 유명한 예언을 하게 된다.

"베스파시안이여, 당신은 요세푸스라는 자를 단순히 하나의 포로로 잡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나는 보다 위대한 운명의 사자(使者)로서 당신에게 온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유대 율법에 따라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저를 네로에게 보내시겠다고요? 왜죠? 당신 이전에 네로와 그 뒤를 계승할 자들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베스파시안이여, 당신은 황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당신의 아들 [= 티투스] 역시 황제가 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나를 보다 더 안전하게 묶어 두시고 지켜 주십시오. 황제여, 당신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땅과 바다와 온 인류의 주님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니을 말씀을 수단으로 감히 당신을 속이려 했다면 [이후] 더 혹독하게 벌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bell 3,400-402).

베스파시안은 이를 전혀 믿지 않고 오히려 포로인 요세푸스가 살아 남기 위해 아첨을 한다고 여겼지만, 점차 요세푸스의 예언에 신뢰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다른 예언들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요세푸스의 결박을 풀어 주지는 않았지만, 베스파시안은 그에게 옷과 귀한 선물들을 하사하며 특별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런 정황에 관해서 그의 자서전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vita 414).
요세푸스의 예언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회의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수에톤(Vespasian 5,6)과 Dio Cassius(Hist. 66,1-4)의 기록 역시, 요세푸스가 체포 당시 베스파시안의 황제 등극 예언을 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세푸스가 향후 로마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그의 베스파시안 황제 등극 예언이었다. 또한 베스파시안은 즉시 네로에게 보내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요세푸스를 계속 대동한다


수감생활, 석방 및 로마의 정세 변화
요타파타를 점령한 베스파시안은, 기원 67 년 7 월 23 일 그 곳을 떠나 해변 도시인 프톨레마이스(Ptolemais: 두로에서 약 30 Km 남쪽에 위치)를 거쳐 가이사랴로 내려왔다. 한 편 예루살렘 저항군들은 요타파타의 함락 소식을 듣고,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더욱이 요세푸스가 로마에 투항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들은 로마인들뿐만이 아니라 요세푸스에 대해서도 복수를 하겠다고 작정하였다 (bell 3,432-442).

67 년 7 월부터 69 년 여름까지, 즉 베스파시안이 사실상 황제로 공포되는 시점까지, 요세푸스의 신분은 전쟁 포로였지만, 사실상 포로 이상의 우호적 대우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c. ap. 1,48; vita 414). 요세푸스는 아마도 가이사랴에서 가장 오랜 수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가이사랴에서 베스파시안은 요세푸스에게, 역시 포로로 잡혀있던 한 유대 여인과 결혼하도록 명하였다 (두 번 째의 혼인). 이 결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요세푸스가 석방됨과 동시에 베스파시안을 수행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갈릴리의 나머지 지역들이 67 년 여름과 가을에 (bell 3,443-4,120), 그리고 요단강 동부와 유대, 이두매의 지방 도시들은 68 년 봄에 정복되었다. 그리고 68 년 6 월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성문에 도착하여 진을 치게 된다 (bell 4,366-490).

바로 이 때를 즈음하여 전쟁은 소강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로마 정부의 급변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네로가 갑작스럽게 죽고 (68 년 6 월 9 일), 뒤를 이어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세 명의 황제가 짧은 기간 동안에 황제직을 맡게되었다 (bell 4,440f.491ff.). 갈바 황제는 무능하고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다가 로마 광장 한 가운데서 살해되고, 후임 오토 황제 역시 비텔리우스와의 권력다툼 가운데 살해되고 말았다. 즉 로마는 온갖 중상 모략과 권력 싸움의 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스파시안과 그의 추종자들은 비텔리우스 황제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는 통치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의 병사들은 로마에서 온갖 약탈과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정치적 형세가 어떻게 변화하게 될 지를 기다리면서 예루살렘 진격을 유보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안의 부하들은 공개적으로 혁명을 논의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베스파시안은 통치 자질을 소유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젊은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안이 건재하며, 브리튼 지역의 총독을 역임하고 당시 로마의 관료로 재직 중이었던 베스파시안의 형 사비누스 등이 버티고 있으므로 흩어진 로마의 힘을 결집하기에 그 누구보다도 적임자라는 논리였다. 그리하여 가이사랴에서 반강제적으로 베스파시안을 황제로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69 년 여름 베스파시안은 에집트와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고 反-비텔리우스 혁명을 시작한다. 이 지역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베스파시안은 대세를 차지한다. 이미 황제나 다름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베스파시안은 요세푸스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깨닫고 그를 석방시켰다. 그의 아들 티투스는 요세푸스의 전과 역시 말소해줄 것을 탄원하였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베스파시안은 도끼로 요세푸스를 묶고 있던 쇠사슬을 내리침으로써 요세푸스의 예언에 대한 상징적인 감사의 답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 플라비우스 가문의 보호를 받게 되고, 그의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 마티아스의 아들 요셉)라는 이름 대신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제 베스파시안과 그 지지자들은 비텔리우스를 치러 로마로 가게 되었다. 로마 제 3 군단 사령관이었던 안토니우스 프리무스(Antonius Primus)는 마케도니아 북쪽에 인접한 모에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떠났다. 안토니우스의 부대가 로마에 곧 당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에 있던 베스파시안의 형 사비누스는 로마 장악을 시도했다 (69 년 12 월 18 일). 다음 날 로마에 있던 베스파시안의 또 다른 아들 도미티안(후에 황제로 등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 역시 이에 합세했다. 쥬피터 신전 카피톨(Capitol)에서 비텔리우스의 부대와 반란군이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이 때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게 된다. 사비누스는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으며 도미티안은 후퇴한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도착하자 비텔리우스는 결국 패배하게 되고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한 편 석방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 티투스 부자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떠났고, 그 곳에서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 후 티투스가 예루살렘 정복 길에 올랐을 때 요세푸스는 그의 수행원으로 함께 떠나게 된다.

이 때가 70 년 봄 혹은 초여름이었고, 이제 예루살렘의 함락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70 년 9 월 26 일). 요세푸스는 이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목도한 증인으로 <유대전쟁사>을 기록하게 된다.

 

박 찬 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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